일요일 신문 07/21/13
원본 기사 https://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406777
국가무형문화재 “채상양”
(일요신문) 대나무는 예로부터 충절과 충절의 상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사랑받아 왔습니다. 대나무는 실생활에서도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대나무 공예의 진수는 다름 아닌
ilyo.co.kr
(일요신문) 대나무는 예로부터 충절과 충절의 상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사랑받아 왔습니다. 실생활에서도 대나무는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채상(彩箱)은 죽공예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채상은 대나무 껍질을 얇게 썰어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하고 밝은 색의 문양으로 엮어 만든 상자입니다. 채상장은 1975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우리나라에서 보호받고 있다.
채상은 품위 있는 여성 가구나 고급 수공예품으로 궁중과 귀족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사진 = 국립무형유산원 제공
채상은 예로부터 귀중품을 보관하는 상자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궁중과 귀족들에게 우아한 여인의 가구나 고급 수공예품으로 사랑받았다. 조선 후기에 채상은 양반과 양반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혼례용품으로 유행하게 되었으며 주로 의류, 장신구, 침, 장신구 등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채상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봉물을 보내는 상자로 쓰이기도 하고, 관원들이 궁정에서 잔업을 할 때 입는 옷을 나르는 상자로도 쓰였다.
조선시대 왕들은 선농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며 풍년을 기원했는데 이때 채상도 사용되었다. 일성록’의 기록에 따르면 정조 5년 5월 8일에 임금이 선농단에 가서 왕의 추수를 참관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조선후기 일부 실학자들은 저서에 채상을 기술해 눈길을 끌었다. 서유구는 농업백과사전 ‘임원시뷰지’에서 “호남인들은 대나무를 종이처럼 갈고, 청색, 적색 등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하여 옷상자로 사용했다”고 기술했다. 또한 ‘목민심서’에서 다산 정약용은 채상을 비단 상자를 의미하는 ‘채상'(綵箱)으로 묘사하며 “문양과 질감이 비단을 바른 듯 섬세하다”고 썼다.
각기 다른 색으로 물든 다올의 모습. 사진 = 국립무형유산원 제공
그렇다면 대나무를 “종이처럼 다듬고 비단처럼 가늘게” 짜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비결은 극도로 까다롭고 섬세한 제조 공정에 있습니다.
사냥 과정은 대나무를 반으로 자르고 또 반으로 여러 번 자르면서 약 7mm 너비의 대나무 가지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후 줄기를 더 매끄럽고 좁게 만들기 위해 긁어냅니다(스트레칭). 다음으로 줄기를 대나무 실이나 끈처럼 가늘게 엮는 작업, 즉 대나무 줄을 엮는다. 채상의 질은 두께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최대한 얇고 균일하게 뜨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 후 리본을 물에 담가 담근 후 스탠드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스위핑” 과정을 거칩니다. 대나무를 한 장 한 장 쓸어내어 종이처럼 가늘게 뽑아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가느다란 로프가 쉽게 끊어질 수 있어 손재주와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다음으로 대나무를 염색하는데 치자나무(노란색) 등 천연 염료로 염색하고 명반으로 물들인다. 채상을 만들 때 배경색은 밝은 색을 사용하고 패턴은 어두운 색을 사용합니다.
씨실과 날실을 짜서 채상에 문양을 만든다. 사진 = 국립무형유산원 제공
색색으로 물들인 리본이 준비되면 본격적으로 ‘채상 짜기’가 시작된다. 겉상자를 먼저 짠 다음 속상자를 짠다.상자의 밑면은 기본적으로 3실 스티치로 짠다. 한편, 패턴이나 문자를 넣어야 하는 부분에는 모양에 따라 1땀부터 5땀까지 다양한 스티치를 넣는다.
채상직물은 밑부분을 먼저 짠 다음 이를 기준으로 상자의 옆면을 접고 상자의 귀를 짠다. 겉 상자와 달리 속 상자는 배경 문양과 어울리는 색의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감싸 아름답게 꾸몄다. 대나무 섬유가 옷이나 물건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내함 안쪽에 한지를 2중으로 붙였습니다. 또한 상자의 네 귀퉁이에 실크를 부착하여 귀퉁이가 쉽게 풀리지 않도록 하여 멋스러움을 더했습니다.
무엇보다 채상의 가치는 패턴의 다양하고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한다. 전통 채상문양은 반야(卍), 수복강령, 십자가, 번개, 줄무늬 등 복을 비는 문양으로 주로 장식되어 있다.
故 서한규와 딸 서신정이 함께 채상을 한다. 사진 = 국립무형유산원 제공
한때 조선 여성들의 가장 바람직한 결혼 대상이었던 채상은 1950년대 이후 플라스틱 제품의 등장과 함께 점차 쇠퇴했다. 장터가 많지 않아 대나무 공예품의 본고장인 담양에서는 채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1975년 김동연 선생이 이 기술(당시 인류문화재)의 1대 소유자로 지정되면서 채상장의 전통은 1987년 2대째 주인 서한규씨가 3대째 주인이 되기까지 거의 이어지지 않았다. , 그는 채상양을 전승하고 전파하기를 열망합니다. 특히 서홀더는 전통 채상 기법과 현대 공예를 접목해 더욱 다양한 죽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옛 전통에 머물지 않고 그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데이터 협업 = 유산 관리